[기고][이선옥의눈] 냥냥씨를 응원하며
주간경향 연재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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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20:11 | 최종 수정 2024.06.1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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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연재(원본 링크)
냥냥씨(별명)는 멘티로 인연을 맺은 친구다. 아이 때부터 만나 어느덧 어른의 문턱에 들어섰다.
그녀가 초등학교 때 ‘조두순 사건’이 일어났다. 냥냥씨는 내게 잔인하니까 기사를 읽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연스럽게 성폭력 이야기로 이어졌다.
멘토인 어른으로서 나는 한 가지를 강조했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나쁜 일은 일어나. 도둑을 맞거나 교통사고로 다칠 수도 있고, 성폭행이나 강간을 당할 수도 있지. 그럴 땐 빨리 몸과 마음을 치료하고 상대를 처벌해서 대가를 치르게 하면 돼. 그건 어른인 내가 반드시 할 거야. 너는 하나만 기억해. 나쁜 일은 나쁜 일일 뿐이라는 거.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 불행이 니 인생을 잡아먹지 않도록 하면 돼.”
성폭력은 여성에게 다른 범죄보다 더 큰 고통을 남긴다고 한다. 그래서 특수하게 취급하고 엄벌에 처하라는 요구가 높다.
그런데 성폭력이 여성의 인생에 특별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할수록 성에 대한 보수적 통념 또한 강화된다. 삶을 파괴하고 회복 불가능한 상처로 남는다며 고통의 절대적 불가역성을 강조할수록 피해 여성의 절망 또한 깊어진다.
여성운동의 딜레마 중 하나다. 고통과 피해의식은 여성들의 일상을 불행으로 이끈다.
3년 전 친구들과 유럽에 갔다. 여자 셋이 떠난 장기 여행인지라 온갖 염려와 경고가 쏟아졌다. 런던에 도착한 우리는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러 밤길을 나섰다. 나는 눈이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향해 웃었다. 호의에 답하는 말을 던지자 한 남성이 자기 집에 가자며 쫓아왔다.
겁이 덜컥 났다. 첫날 겪은 사건의 공포로 웃음 금지령이 떨어졌고 한동안 긴장 속에 다녔다. 소매치기의 도시에서는 가방을 움켜쥔 채 두리번거렸고, 테러가 일어난 곳에서는 모든 사람을 경계했다. 여행이 즐겁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을 바꿔먹기로 했다.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염려가 우리의 여행을 불행하게 만들도록 놔둘 수는 없다.
막연한 공포를 객관 사실과 낯선 이들의 환대로 극복하면서 남은 여행 일정을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힘 있는 여성은 시대에 뒤처진 현재를 과감하게 뛰어넘는다. 아직은 다른 서사가 불가능해 보였기에 이른바 약한 성이 자신에게 떠맡기듯 부여한 피해자의 지위에 매달렸던 변화의 몇십 년은 지나갔다. 힘 있는 여성은 이룰 수 없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의 가능성이다. 왜 우리는 이 가능성을 붙들지 않는가?”
독일의 여성 저널리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스베냐 플라스펠러가 저서 〈힘 있는 여성〉에서 한 말이다.
알 듯 모를 듯한 끄덕임으로 나의 조언에 답했던 냥냥씨는 나쁜 일은 빨리 잊고, 해결 중심으로 생각하며, 지금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 어른으로 자라고 있다. 이제 자신의 멘티에게 나쁜 일은 나쁜 일일 뿐이라고 말하는 중이다.
불행한 피해자가 아닌 ‘힘 있는 여성 되기’야말로 삶을 단단하게 지키는 현실의 가능성이다.
이선옥 작가·이선옥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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