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표현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비난받거나 제재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동원할 수 있는 가설들을 하나하나 제시한 후, 이러한 주장이 왜 성립할 수 없는가에 대한 논증을 통해 페미 진영의 남혐불성립론을 탄핵하는 글을 싣는다.
글은 세 편으로 나누어 게시하며, 그 두번째 글이다.
⓷ 마지막으로 해악 자체는 남성에게도 발생할 수 있지만 남성에 대한 혐오표현이 그 해악을 초래할 가능성은 없으므로, 즉 혐오표현과 해악 사이의 인과관계가 성립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남성에 대한 혐오표현은 비난과 제재의 대상이 아니라는 가설을 제시해보자.
여기서 ‘가능성이 없다’는 애매한 문구이므로 이를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검토해본다.
우선 ⅰ) 현 사회는 남성이 강자인 가부장제 사회이므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남성에 대한 혐오표현에 영향을 받아 남성에게 차별이나 폭력 등 별도의 해악을 발생시키는 행위를 하는 자가 논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가능성 0의 확신이다.
이는 백인이 강자인 미국 사회에서는 백인에 대한 혐오표현에 영향을 받아 백인이라는 이유로 폭력 등을 저지르는 흑인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과 같다.
이런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것이 틀렸음은 이미 미국의 정부기관이 발표하는 인종적 증오범죄 통계가 입증한다.
세계일보의 기사
증오범죄 통계법에 따른 분류를 보면 반흑인, 반백인, 반아시아계 모두 증오범죄 대상이다. 논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 가능성이 없다는 말은, 누군가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 이하로 대우해도 좋다’는 메시지를 말하고, 누군가 그 메시지에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행동할 가능성‘ 자체가 논리적‧물리적으로 상정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실제 그러한가? 로리타는 범죄이지만 쇼타는 취향일 뿐이라는 페미니스트 교수의 말을 추종한 여성은 남성아동에게 범죄를 저질러 처벌을 받았다.
메갈리아 사이트와 워마드, 트위터, 여초 커뮤니티 등에는 남성에 대한 폭력과 증오의 메시지가 등장하고, 일군의 여성들은 이를 피켓으로 만들어 시위에 들고 나온다.
이 시위에 참가했던 어느 여성은 주점에서 남성의 성기를 비하하는 용어를 쓰다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혜화역 시위에 여성들이 들고나온 피켓들
특정 집단을 동등한 인격체 이하의 존재로 봐야 하며 그렇게 대우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실행할 기회가 주어지면 실행할 경향성을 가지게 된다.
남성이 동등한 인격체 이하의 존재라는 표현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그들이 남성에 대한 차별이나 폭력으로 나아갈 유리한 기회를 잡는다면 그러한 차별이나 폭력을 행하게 될 수 있다는 전개에는 논리적 모순이나 물리법칙 위배가 없다.
다음으로 ‘가능성이 없다’는 애매한 문구에 대한 다른 해석은
ⅱ) 현 사회는 남성이 강자인 가부장제 사회이므로, 남성에 대한 혐오표현의 영향을 받아 남성에게 차별이나 폭력 등 별도의 해악을 발생시키는 ‘빈도가 매우 낮을 것’이므로 제재나 비난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주로 홍성수 교수가 이런 식의 주장을 한다.
그는 자신은 "남성혐오는 성립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성립되기 ‘어렵다'’’고 했음을 강조한다. 성립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는 주장과 차별성을 두어 그 견해에 대한 비판은 비껴가면서 자신의 주장에 다소의 합리적 탈출구를 열어두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탈출구는 없다. 이러한 류의 주장에는 드러내어 말하지 않는 은밀한 규범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동일한 구성요건을 갖는 어떠한 행위가, 행위자의 정체성별로 분류한 통계에서 발생빈도가 낮게 집계된다면, 그 정체성을 가진 행위자의 행위는 아예 비난과 제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규범이다.
그러한 규범이 전제되어야 ‘여성은 폭행 당해야 마땅하다’라는 표현, ‘남성은 폭행 당해야 마땅하다’라는 표현처럼 동일하게 특정 집단을 공격하고 적대하는 성격의 행위에 대해 하나는 비난받고 제재받아야 하지만, 다른 하나는 비난과 제재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누구라도 알 수 있듯 이러한 전제는 부당하다.
페미 진영은 강력흉악범죄의 피해자가 8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므로 여성은 언제나 피해자이며 성차별의 해악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도 근거는 '빈도'다.
범죄의 피해는 남성이나 여성을 가리지 않지만 발생빈도에서 압도적이라는 근거가 이들의 유일한 무기다. 이들은 그러므로 남성에 대한 개조교육을 실행해야 하고, 여성 피해자에 대한 배타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의 가해행위에 대해 지적하면 일부 여성의 문제를 여성 전체의 문제로 본다고 비난하며 어떠한 책임의 말도 하지 않는다. 남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우연한 이유로 범죄의 피해에 대한 보호에서 차별을 당하고 오히려 예비적 가해자라는 누명 속에 살아간다.
어떤 행위가 인과적으로 해악을 초래한 책임을 지게 되는 동일한 행위라면, 행위자의 정체성에 따라 분류한 통계에서 발생 빈도의 높고 낮음이라는 우연한 요소로 인해, 행위의 비난 가능성이 전적으로 성립하거나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여성이 남성에게 저지른 재물 손괴가 잘못인가 아닌가는, 여성이 남성에게 재물손괴를 저지르는 빈도가 얼마나 많은가와는 무관하게 판정된다. 어떤 행위가 해악의 발생과 밀접한 위험을 가지므로 제재되어야 한다면, 실제로 발생하는 해악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발생의 위험을 막기 위한 규범 위반의 책임을 지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권총과 같이 사람을 사상할 수 있는 무기를 사용한 범죄는 남성이 더 많이 저지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칙적으로 소지를 금하는 규범에서 여성이 제외되지는 않는다.
권총을 허가 없이 소지하는 위험한 성격의 행위를 동일하게 범하고 있다면 위험방지를 위한 규범 위반의 책임을 동등하게 지는 것이지 여성이라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특정 집단을 적대하는 행위가, 어떠한 행위자가 같은 유형의 잘못을 많이 범하는가 적게 범하는가라는 요소로 인해 아예 비난에서 면제되는 규범은 부당하다.
남성에 대한 증오심의 확산과 현실의 남성혐오
혐오표현에서의 남성혐오로 돌아가보자.
남성에 대해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부인하거나, 신뢰성, 도덕성을 폄하하는 말들이 범람하는 현실에서 남성에 대해 폭력과 차별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이며, 자신이 실제로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정성스레 증명하는 것이 시민적 의무라는 표현이 광범위하게 수용되는 현실은 실제로 남성에게 유죄추정원칙을 적용하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형사사건의 예를 들어보자.
성범죄를 다루는 법정에서 같은 시간과 장소를 두고 대립하는 피고인(남성)과 증인(여성)의 진술이 있는 경우, 둘 다 일관되고 구체적인 진술을 하여도 남성의 말은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물증이 없으면 거짓으로 배척하고, 여성의 말은 설사 전후 정황이 부합하지 않아도 쉬이 배척해서는 안 되고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 증거로 취급된다.
이러한 판결이 근래의 경향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고 부당한 이득을 얻는 존재이며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패악의 공모자라고 규정하는 표현은, 실제로 남성이 어떠한 일에 지원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은 차별조차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을 낳는다.
정부는 국립대의 교수 비율에 여성할당을 강제하는 법을 제정하고, 이에 따라 한 국립대학은 교원의 임용에 ‘여성’인 사람만 지원할 수 있다고 공고한다.
그러한 공고는 법적으로 제재받지 않는다.
국가의 예산으로 운영하는 창작물 공모전에서는 예술성이나 작품성과 같은 평가 기준 외 여성 캐릭터의 등장 빈도나 여성 제작자의 참여 여부와 같은 작품성과는 무관한 요소에 가산점을 부여한다.
조선일보의 기사
정부기관의 공모전에 여성가산점을 적용해 남성은 탈락한다. 이러한 차별로 인한 피해는 국가기관이 제도의 외피를 두르고 시행하기 때문에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처럼 치장되는 것일 뿐, 그 자체가 폭력과 차별로 인한 해악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를 해악이 아니라고 한다면 남성은 폭력과 차별로 인한 피해를 입을 수 없다는 주장의 부당함을 반복하는 것이다. 즉 해악 개념을 정의하는 단계부터 미리 해악이란 남성에게는 발생할 수 없으므로, 그 어떤 일이 남성에게 발생하여도 그것은 해악이 아니라는 결론을 동어반복적으로 끌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남혐불성립론이 일으키는 연쇄적 해악
이러한 상황은 또 다른 연쇄적 해악을 낳는다.
국가적인 차별과 폭력 행위가 합법적으로 권위를 부여받으면서, 의도적이거나 얼마간의 의도를 담아 피해를 입히는 개인의 행위가 늘어나게 된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 하필 지하철에 앉아 있는 자기 앞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다 땀을 닦는 남성을 보고 ‘그냥 누구 한 명을 고소하고 싶어서’ 없는 말을 지어내 고소하는 여성,
남성 누드모델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불쾌하다며 나체사진을 온라인에서 돌려보며 조롱하는 여성들,
같은 술집에 있는 남성에게 성기를 빗댄 조롱으로 시비를 걸다 일어난 폭행사태에 대해 거짓으로 청원을 하고 수십만 명의 동조자를 만들어내는 여성들.
이러한 일련의 사건과 이를 두둔하는 현상은, 피해를 입는 사람이 남성이기 때문에 어떤 연유로든 피해를 입어도 마땅하다는 사상에 깊게 빠진 인식들이 상당한 원인으로 작동한 것이다.
그냥 누구 한 명을 고소하고 싶어서 고소했다는 여성(출처: 한국성범죄무고상담센터)
둘째, ‘혐오에 대한 제재와 비난의 근거는 별도의 해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혐오표현 행위 자체가 해악’이라는 견해를 취하는 경우이다.
(첫째는 앞의 글에 적은, 혐오 제재의 근거가 별도의 해악 때문이라고 보는 가설이다.)
혐오행위가 해악 자체를 구성한다는 주장이 타당하려면, 혐오행위는 적대적 환경의 조성이며 적대적 환경은 그 자체가 독립된 해악이라는 주장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혐오이므로 당연히 나쁘다’는 수준을 넘어 이에 대한 논증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이 가설에 따른다면 사회적 환경 전체가 환경적 희롱이나 괴롭힘의 해악 구조가 되어야 한다.
즉 A가 혐오표현을 통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존재에 대하여 B가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되고, B가 부정적인 견해를 전제로 C에게 별도의 피해 행위를 입히는 인과적인 구도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A의 혐오표현 자체가 곧바로 C에게 살아가기에 적대적 환경을 구성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우선 직장이나 학교와 같은 특정한 환경에서 규제가 필요할 때 사용되는 개념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표현 모두에 대해 근거없이 확장해서 적용하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반대하는 정당의 지지자들을 향한 격렬한 적대적 표현을 현수막이나 대자보에 써서 직장이나 학교에 붙이는 것과, 학과 공지게시판에 올리는 것, 직장 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리는 행위와, 동일한 내용을 자신이 당원으로 가입한 정당의 게시판이나, 일반적인 온라인 게시판, 혹은 자신이 집필하는 책에 쓰는 것을 동일하게 취급한다면 문제가 된다.
위의 가설은 이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논리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이 주장은 이미 내적으로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해악을 이런 것으로 판단한다면 이야말로 성별을 불문하고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학생들이 여성 교수에게 ‘여자가 무슨 학생들을 가르치나, 여자는 ***이다. 00같은 여자는 사회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하다’라는 말을 강의시간에 질문을 빙자해 퍼붓거나, 강의실에 그런 말을 써서 대자보를 붙였을 때 발생하는 종류의 해악은,
남성 교수에게 ‘남자가 무슨 강의를 하나, 00같은 남자는 사회에서 축출되어야 한다’며 같은 행위를 했을 때 발생하는 해악과 동일한 종류의 해악이다.
어떤 적대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해악이든 그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후속적 영향은 피해자의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똑같이 백만원을 절도 당했다 하더라고 한 달 수입이 백만원인 사람과 천만원인 사람에게 미치는 후속영향이 다른 이치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하나는 해악이라고 하면서 하나는 전혀 해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를 들어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12조(직장 내 성희롱의 금지) “사업주, 상급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 내 성희롱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를 “남성인 사업주, 상급자, 또는 근로자는 여성인 사업주, 상급자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만일 직장이나 기업, 관공서에서 특정 성별을 적대하고 배척하며 폄하하고 모욕하는 상징적 환경의 조성이 남녀 공히 피해자로 만드는 해악을 구성한다면, 사회 전체에 그 해악 개념을 확장시킨 경우에도 같은 이치가 성립해야 할 것이다.
여성에 대한 행위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확장적 해악 개념이 그대로 이전되면서 남성에 대해서는 아예 단절되어버린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만일 남성이 비도덕적이며, 잠재적 가해자이거나 존재 자체로 가해자이며, 평생을 속죄해야 할 존재이며, 불의한 사회구조에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존재라는 적대적인 표현을 받아들인다고 전제해보자.
이런 전제가 통용되어 차별적 조치들이 법제화되고, 남성이 욕설을 당하고 신체가 훼손되는 상징을 게시 당하며, 사자가 되어서도 모욕을 받고, 산재사고로 사망하면 잘 죽었다고 고소해하는 조롱의 대상이 되고, 길거리에 그런 게시글이 가득하며, 인터넷에 들어가면 댓글마다 그런 내용이 가득하다고 해보자.
적대적인 환경 조성을 해악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사회 전체적으로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남성에 대하여 위와 같은 내용이 발언되는만큼 그 해악은 각 개인 남성들에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에게만 해악이 발생한다는 남혐불성립론자들의 주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입증이 가능한 논리가 없다.
지금까지 혐오를 특정 집단이 특정 집단에 할 수 있는 행위에만 한정하는 개념 규정은, 그러한 개념을 사용하는 국제기관이나 다른 국가의 법에도 근거가 없을뿐더러, 그러한 별난 개념 정의를 뒷받침할만한 논증 또한 모든 경우의 수를 전제로 삼아 시도해봐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았다.(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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