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남혐은 없다’는 홍성수, 이나영, 정희진, 진중권 등에 대한 반론(4): 논리적 탄핵시리즈 최종⓷

이선옥 승인 2021.12.12 13:26 | 최종 수정 2024.10.26 20:37 의견 0

혐오표현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비난받거나 제재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동원할 수 있는 가설들을 하나하나 제시한 후, 이러한 주장이 왜 성립할 수 없는가에 대한 논증을 통해 페미 진영의 남혐불성립론을 탄핵하는 글을 싣는다.

이번 글은 논리적 탄핵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지금까지 가능한 모든 가설을 동원해 혐오표현의 개념이 혹시라도 성별로 다르게 성립될 수 있는지 세세한 논증을 시도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남혐은 성립할 수 없다는 페미 진영의 주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입증될 수 없는 억지스러운 궤변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일 이들의 주장이 논증에 성공했다면 각 국가의 법률은 이미 혐오표현이나 혐오행위에 대해 성별에 따라 다른 처벌을 가하는 법문언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혐오표현이나 혐오행위라는 개념을 자의적으로 왜곡하려는 궤변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페미 진영의 궤변과 그것이 탄핵되는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혐오표현을 비난하고 제재할 근거로 그 혐오표현이 인과적으로 초래하는 별도의 해악을 드는 견해다.

여기에서 별도의 해악은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규정한 ‘남성지배 가부장제 하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폭력과 차별로 인한 피해’라는 개념이다.

이러한 주장이 논리로 성립할 수 없는 이유는, ‘왜 성별에 따라 범위를 한정하는 ‘혐오’ 개념을 택하는가?‘라는 물음에, 다시 ‘성별에 따라 범위를 한정하는 구조적인 폭력과 차별로 인한 피해로서의 해악’ 개념을 임의로 택한 답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순환논리이며 동어반복적일 뿐 아니라, 특정 이념에서 해악 개념을 아무리 자의적으로 한정하여도, 실질적 해악을 발생시키는 행위를 비난에서 면제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다.

둘째, 혐오표현을 비난하고 제재할 근거로 별도의 해악을 들면서, 우리 사회는 남성이 강자인 가부장제 사회이므로 남성에 대한 혐오표현은 남성에게 차별이나 폭력 등 별도의 해악을 발생시키는 '빈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제재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어떤 행위가 인과적으로 초래하는 해악에 대하여 책임 있는 성격의 동일한 행위라면, 행위자의 정체성(성별 등)에 따라 분류한 통계에서 기록되는 발생빈도의 높고 낮음이라는 우연한 사정으로, 행위에 대한 비난 가능성이 전적으로 성립하거나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는 볼 수 없으므로 이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게다가 남성에 대한 혐오표현은 현재 공공기관의 부당한 법집행과 그런 부정의를 기화로 개인들의 불의한 행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기도 하다.

셋째, 혐오표현 행위 자체가 적대적 환경의 조성이라는 해악을 구성한다고 보면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는 혐오표현을 하더라도 적대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지만 여성에게는 조성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직장이나 학교 등의 공간에서 그 인격을 비하하는 적대적인 주장을 게시함으로써 특별한 간섭 없이 누려야 하는 생활상의 부당한 제약이 남성에게도 발생될 수 있고 현행법은 그러한 경우도 제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당하다.

'남혐은 성립할 수 없거나 혹은 성립하기 어렵다는 페미 진영의 주장을, 그들의 입장에서 가능한 가설을 다 동원해 논증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어떠한 논리를 동원해도 다른 구성원을 동등한 인격체 이하의 존재로 다루어 적대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할 행위라면, 그 대상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갑자기 도덕적으로 허용되거나 칭찬받아야 할 행위로 변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성별로 나누어 하나는 심하게 제재되어야 할 권리 침해 행위로 규정하고, 다른 하나는 심지어 해방적인 운동이거나 전적으로 무해한 행위로 다루는 주장은, 사회 구성원들의 일부를 무방비 상태로 공격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작업에 불과하다.

공동체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가고, 구성원들을 동등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배격되어야 마땅하다.

불명확의 영역인 혐오표현

혐오표현 자체에 대한 규제와 처벌요구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긴 시리즈를 마치려 한다.

‘혐오’와 ‘표현’은 모두 불명확성의 영역에 놓여 있다. 특히 해석의 자의성과 감정의 개입은 이러한 불명확성을 도드라지게 한다.

많은 언어적 행위는 일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유리하거나 우호적으로 작용할 수도, 불리하거나 적대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정 집단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 자체로는 규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특정 집단에 관하여 명백히 사실인 통계를 발표하거나, 그 특정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거나, 그 특정 집단의 일원과 관련하여 불쾌한 일화를 보고하거나 하는 일은 모두 해당 집단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한 표현을 모두 금지할 경우 그 특정 집단을 아예 비우호적으로는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성역화된 존재로 만들게 된다. 그러한 근거를 들어 일률적으로 표현을 금지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억압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미국사회에서 흑인은 흑인에 의해 가장 많이 살해를 당한다. 그러나 이는 특별한 뉴스가 되지 못하며 백인에 의해 흑인이 살해를 당할 때에야 우리는 뉴스로 이 사실을 접한다.

흑인의 범죄율이 높은 것은 가치판단 이전에 존재하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관계 자체는 어떠한 제약 없이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사태의 원인을 분석하거나 해결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이를 표현할 자유 자체가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종적 편견을 강화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면 흑인의 범죄율을 발표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며 이는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많은 사실관계들이 혐오와 편견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표현의 제약을 당한다.

몇 년 전 풍등을 날려 고양시의 저유소에 화재를 일으킨 스리랑카인의 국적을 표기한 여러 매체가 비판을 당한 일이 있다. 사건사고를 보도하는 차원이었음에도 이러한 표현이 제노포비아를 일으켜 스리랑카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작동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몇몇 매체는 반성적 기사를 실었고 일부 언론인은 업계의 자성을 촉구하며 재발 방지를 다짐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여자 대학생을 성폭행한 스리랑카인의 국적을 보도한 기사에 대해서는 이러한 비판과 자성이 일지 않았다.

우발적 범행과 성폭행 가운데 범죄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성범죄가 더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혐오편견 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이 사안에서는 범죄 혐의자의 국적보다 성범죄라는 범행의 종류가 더 강하게 판단의 기제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만일 인권운동 진영이 사회적 약자인 이주노동자가 저지른 성폭행의 경우 국적을 보도하면 인종적 편견과 혐오가 강화되므로 국적 표기를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면 여성단체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우발적 범행에는 국적 표기를 하지 말고, 성폭행범은 표기해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난민 가운데 성범죄 피의자가 나온다면 국적 표기를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어떤 나라는 국적을 표기해도 되고 어떤 나라는 안되는지, 어떤 범죄에는 국적을 표기해도 되고 어떤 범죄는 안 되는지, 어떤 사건은 표기해도 되고 어떤 사건은 안 되는지 사안마다 맥락이 다 다르므로 명확한 기준 제시란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혐오표현'이라는 개념은 일정한 주장자들이 자신들이 허용하고 싶지 않은 표현을 모두 쓸어넣는 거대한 광주리로 사용되고 있으며, 규제 논의를 이끄는 사람들의 주관에 따라 범위가 정해지는 물렁한 개념이 되고 만다.

한 가지 사안에도 다양한 맥락과 상황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혐오표현의 금지는 명확성의 원칙을 충족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규제의 기준이 되는 법개념으로서 실패한 것이다.

권리논증에도 실패하고, 법개념으로서도 실패하였으며, 사회구성원 일부를 공격하는 이데올로기적 공세로 이용되는 혐오표현에 대해 페미 진영의 개념규정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 '여혐은 가능하지만 남혐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은 굳이 논증 단계까지 가지 않아도 보편의 상식으로도 동의받지 못한다.

  • 혐오가 나쁜 것이라면 누구를 향한 것이든 배격되어야 한다
  • 어떠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권리논증을 거쳐야 한다
  • 권리논증을 통과하지 못한 주장은 기각되어야 한다

이러한 규칙을 우리는 상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반지성주의자들이 권력을 가진 세상에서 상식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상식보다 왜곡된 선동이 우위인 상황일수록 지성이 작동할 토대를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처럼 길고 건조한 글을 끝까지 읽는 독자들에게 반지성주의자들의 왜곡과 선동에 대처할 수 있는 논리적 토대를 조금이라도 제공하는 것이 이 시리즈를 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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