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닷컴은 오픈 특집기획으로 <나의 아저씨> 리뷰大展을 마련했습니다.
잔잔한 감상기부터 연출기법을 통해 분석한 전문가적 비평, 나저씨 혹평 현상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비평까지 흥미있는 글들이 가득합니다.
첫 번 째 글은 20대 여자 혜수씨의 나저씨 감상기입니다.
준비한 글 모두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편집자주)
타인에 대해 안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다.
얼굴을 아는 사이여도 마주치면 어색해 자리를 뜨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접하면 그 순간 이상한 사람으로 판단해버린다.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일은 결코 없다.
다양한 추측들만 그의 뒤에서 부풀려질 뿐이다.
같은 연령, 같은 성별, 공통분모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안다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하물며 다른 세대 간은 어떨까.
나는 20대 중반에 들어선 여성이다.
내 또래 친구들이 ‘아저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안다.
‘아재’, ’꼰대’, ‘개저씨’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그 ‘개저씨’의 작은 표정과 행동, 말투 모두 혐오의 대상이다.
물론 나도 살면서 많은 ‘개저씨’들을 겪었고 그들의 무례함과 폭력성을 잘 안다.
중고등학생 때 나는 아저씨들의 사고방식을 세대차이의 가장 큰 원인으로 여기며 서양 문화권의 아저씨들과 곧잘 비교했다.
저 나라에는 왜 ‘세대차이’라는 사회문제가 없을까.
역시 우리나라 아저씨들이 문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땐 5-60년대의 중학교 취학률이 3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놀랍지 않은가? ‘개저씨’들 10명 중 단 3명만이 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니.
중학교 취학률이 60퍼센트를 넘긴 건 1978년도부터였다.
(출처 : 재적학생수 - 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 내가 어렸을 때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친구를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
기본적인 공교육조차 받지 못한 세대와 우리 세대가 서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왜 저런 아저씨를 이해해 줘야해?"
어찌됐든 ‘아저씨’라는 단어는 지금 흉물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런 아저씨들을 드라마의 소재로 삼은 것을 두고 주위의 시선은 이랬다.
“우리가 왜 저런 아저씨를 이해해 줘야해?” “딱 봐도 한남의 망상 천지겠군” 일부 여초 사이트에서는 이미 나의 아저씨 대신 ‘느그 개저씨’라 불렸다.
드라마 제목이 어린 여성과 중년 남성 사이의 로맨스를 연상시킨다며 예전 로리타 논란(가수 아이유가 로리타 컨셉으로 작품활동을 한다며 여성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사건)도 다시 불거졌다.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부터 비판여론이 일더니 2회의 장면 중 일부만 잘라내 데이트폭력 논란까지 등장한다.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부터 수많은 악플과 억측, 비난이 쇄도했고, 방영 내내 ‘욕설을 했다, 아이유의 머리를 때렸다’는 등 <나의 아저씨>가 마치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는 기사들이 쉴새 없이 올라왔다.
그 기사만 읽고 드라마를 보지 않은 채 또 드라마를 조롱하는 반응을 보다 보면 어이가 없었다.
재미있게도 <나의 아저씨>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란 듯이 전면에 내세웠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에 대해 모른다는 걸. 알고 싶지도, 알려 하지도 않는 우리.
그 아저씨가, 그 남자가, 그 여자가, 그 ‘또라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제 멋대로 추측하고 판단하는 우리.
신뢰가 사라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훈 "누가 나를 알아.
나도 걔를 좀 알 것 같고" (화면캡처)
스물 한살 지안과 마흔 다섯 동훈은 서로를 꽤 잘 안다.
지안이 동훈에 대해 알게 된 건 도청을 통해서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안은 동훈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도청이라는 수단을 이용하고야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단절된 세상이 <나의 아저씨>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란 생각을 했다.
지금 우리들처럼 ‘저 사람은 좋겠다.
달에 몇 백만 원을 꼬박 버는데 뭐 힘든 일이 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며,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동료와 뒷담화를 하고, SNS에는 ‘어떤 한남이’, ‘어떤 한녀가’로 시작하는 글을 올릴지도 모른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은 지안에게 동훈은 처음으로 네 번 이상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이었다.
지안이 들여다 본 동훈은 ‘성실한 무기징역수’였다.
아무것도 없는 빈 껍데기의 삶을 사는 동료. 지안은 그를 관찰하게 되고, 그의 한숨을 이해하게 되고, 그와 자신이 조금 닮았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살면서 처음으로 위로라는 걸 받게 된다.
노력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지안은 위태롭게 살아간다.
부모님이 짊어주고 간 빚을 갚기 위해 밤낮 구분 없이 일하고, 일하는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훔쳐온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할머니가 있다.
무료로 요양시설 이용이 가능한 제도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어른은 없었다.
지안은 혼자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나가고 있었다.
여태껏 지안을 네 번 이상 도와준 어른은 없었다.
다들 소녀가장을 불쌍히 여기지만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안을 도와주다 지쳐, 혹은 자신마저 그 구렁텅이에 빠져버릴 것 같은지 곧 손절하고 떠난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은 지안에게 동훈은 처음으로 네 번 이상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이었다.
동훈은 그의 뇌물 혐의를 벗게 해준 지안에게 고마워 하는 마음이었다가, 그녀의 삶을 알고 난 후부터 진심으로 지안이 행복하기를 바라게 된다.
"나 같아도 죽여.
내 식구 패는 새끼들은 다 죽여!" 동훈의 말에 지안은 오열한다.
(화면캡처)
중학생 시절 지안은 자신과 할머니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사채업자를 죽였다.
죽은 사채업자의 아들이자 지안에게 따뜻했던 광일은 그녀를 원망하기 시작하면서 지독하게 괴롭힌다.
광일의 아버지를 죽인 후 지안의 마음은 후련했을까? 어린 지안에게 살인이라는 경험은 악몽이었을 거다.
아무리 자신과 할머니를 괴롭히던 인간이었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본인의 행동이 옳았는지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현실에서 괴롭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지안에게 동훈은 처음으로 위로를 건네 준 어른이었다.
“나 같아도 죽여.
내 식구 패는 새끼들은 다 죽여!”
그 순간 지안은 길거리에서 주저앉아 오열하고 만다.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 어느 누가 쉽게 ‘네 잘못은 없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안이 스스로를 질책하고 혐오하고 방어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죄책감은 동훈에 의해 처음으로 씻겨져 나갔다.
사랑의 종류가 어떻게 한 가지인가
그렇게 서로의 삶을 알아버린 지안과 동훈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 대해 마음을 쓰게 되지만, 그 마음이란 게 단순하지 않다.
고마움, 동질감, 안쓰러움, 존경심 같은 것들.
어쩌면 ‘사랑’이라 명명할 수도 있을 테지만, 사랑의 종류가 어떻게 한 가지인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
우리는 수 많은 종류의 사랑을 직접 느끼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껏 TV 드라마에서는 보통 연인과의 사랑만을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말이다.
지안과 동훈이 서로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을 단순히 ‘아저씨와 어린 여자의 부적절한 만남’으로 치부해버리는 일부 인터넷 여론은 간과하고 있다.
나에게 물어보게 된다.
누군가가 나의 외로움과 고민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알아준다면, 그래서 나를 위해 울어준다면 과연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에게 박동훈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마음 쓰지 않을 수 있을까? 심지어 그 사람이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중년 아저씨라면 과연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또 한편으로는 나는 언젠가 한 번쯤이라도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었을까, 하는 물음도 던져본다.
나를 많이도 울렸던 드라마다.
지안이 길거리에서 주저앉아서 오열하던 장면, 동훈의 도움으로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 할머니가 고생한 지안과 이마를 맞대며 서로를 위로하던 장면, 영안실에서 할머니를 마주하며 엉엉 울던 지안, 바람 피운 것을 사과하는 윤희와 동훈이 나눈 대화.
이선균, 아이유의 연기가 너무나 절절해서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울면서 턱이 달달 떨리던 아이유의 연기는 정말 최고)
아이유는 본인의 과거 로리타 논란이 드라마에 악영향을 끼칠까 걱정했고, 이선균은 여주인공의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나이 많은 남자라며 악플에 시달렸지만, 이지안과 박동훈이 아이유와 이선균이었기 때문에 <나의 아저씨>가 깊고 입체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저주와도 같았던 루머와 악플을 떨쳐내고 보란듯이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과, 멋지게 작품을 완성시켜준 스탭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우리 모두 어떤 측면에서는 지안이고 동훈인 것 같다.
성실하게 살아가면서도 타인에 대해 무감각하고, 말 실수도 하고, 괴로운 기억을 가슴 한 켠에 쌓아두고 살아가는.
<나의 아저씨>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던 것처럼, 편견에 쌓여 서로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언제쯤 서로를 알 수 있을까?
드라마가 끝나고 이선균이 남긴 말이 떠오른다.
“앞으로 세상의 많은 이지안과 박동훈이 서로 소통하고 격려하고 응원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서로가 행복해지기를, 편안함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이선옥닷컴 오픈특집기획 <나의 아저씨> 리뷰大展
그 사람에게 마음 쓰지 않을 수 있을까《1》 by 혜수
K-드라마의 독보적 성취: 김원석감독 作 <나의 아저씨>《2》 by 박박사
<나의 아저씨>가 데려다 준 이들《3》 by 이선옥
부제(인 척 하지만 사실은 원제) : <나의 아저씨>와 작품을 둘러싼 주변에 대해《4》 by 홍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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